에드워드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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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7세는 1841년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장남으로 태어나 1910년 사망한 영국의 국왕이다. 그는 60년 동안 웨일스 공으로 지내며, 사교적이고 유흥을 즐기는 생활로 명성을 얻었지만,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장기 집권으로 인해 공무에서 멀어졌다. 1901년 즉위 후 외교에 힘써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과의 협력 관계를 맺어 '평화 조정자'로 불렸으며, 9년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영국을 유능하게 통치했다. 그는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으며, 말년에는 심한 기관지염과 기저세포암으로 고생하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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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7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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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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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901년 1월 22일 – 1910년 5월 6일 |
즉위식 | 1902년 8월 9일 |
즉위식 종류 | 대관식 |
인도 황제 즉위식 | 1903년 1월 1일 |
인도 황제 즉위식 종류 | 임페리얼 더바르 |
선임자 | 빅토리아 |
후임자 | 조지 5세 |
출생일 | 1841년 11월 9일 |
출생지 | 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 |
사망일 | 1910년 5월 6일 |
사망지 | 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 |
매장일 | 1910년 5월 20일 |
매장지 |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왕실 지하 묘지 1925년 11월 28일: 세인트 조지 예배당의 앨버트 기념 예배당 1927년 4월 22일: 세인트 조지 예배당 남쪽 통로 |
배우자 | 알렉산드라 오브 덴마크 (1863년 3월 10일 결혼) |
자녀 | 앨버트 빅터, 클래런스 공작 조지 5세 루이즈, 왕녀 빅토리아 공주 모드, 노르웨이 여왕 웨일스의 알렉산더 존 왕자 |
전체 이름 | 알버트 에드워드 |
왕가 |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
아버지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자 |
어머니 | 빅토리아 여왕 |
종교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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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
교육 기관 |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
왕위 계승 | |
왕위 | 영국 국왕 및 영국 자치령 국왕 인도 황제 |
참고 | |
기타 | "군주의 장남" (법정 추정 상속인) 최장 기록은 찰스 3세가 2011년 4월 20일에 에드워드 7세의 기록을 경신했으나, 찰스가 웨일스 공에 서임된 것은 1958년 7월(9세 8개월)으로, 태어나자마자 서임된 에드워드 7세보다 훨씬 늦었다. 때문에 웨일스 공으로서 재임 기간은 여전히 에드워드 7세가 가장 길었으나, 이 기록 또한 2017년 9월 9일에 찰스가 경신했다. |
2. 생애
에드워드 7세는 1841년 11월 9일 런던의 버킹엄 궁전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태어나면서 콘월 공작과 로시 공작이 되었고, 한 달 후 웨일스 공에 봉해졌다.[5][147] 왕실 가족에게는 '버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3]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아버지 앨버트 공은 에드워드가 모범적인 입헌 군주가 되도록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7] 1859년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영국 역대 국왕 중 최초로 대학교에서 공부한 왕이 되었다.[229] 1861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옮겨 공부했다.[12][13]
1863년 3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9세의 딸 알렉산드라와 윈저 성에서 결혼했다.[25] 두 사람은 3남 3녀를 두었으나, 에드워드는 결혼 생활 내내 여러 정부를 두었다.[29][30][32]
에드워드는 사교적이고 유쾌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지만,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861년 아버지 앨버트 공이 사망하자, 빅토리아 여왕은 아들의 경솔함을 탓하며 그를 멀리했다.[22][23]
왕세자 시절 에드워드는 여러 차례 해외 순방을 다녔다. 1860년 북미 순방은 그의 자신감을 높이고 대영제국에 외교적 이점을 가져다주었다.[16] 1875년에는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 지배층의 회유에 힘썼다.[42]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자 에드워드 7세는 5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65] 그는 '에드워드 7세'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왕조 이름을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변경했다.[66] 1902년 8월 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73]
즉위 후 에드워드 7세는 외교와 군사 문제에 주력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통했던 그는 유럽 각국을 방문하며 왕실 외교를 펼쳤다.[82] 특히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에 힘써 1904년 영불 협상을 체결, 오랜 갈등을 종식시켰다.[83] 그러나 독일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에드워드 7세는 빌헬름 2세 독일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는 양국 간 긴장을 고조시켰다.[85]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는 기관지염 악화로 사망했다.[405] 그의 장례식에는 세계 각국의 왕족과 지도자들이 참석했다.[407]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에드워드는 1841년 11월 9일 버킹검 궁전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의 장남이자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1] 1842년 1월 25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앨버트 에드워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2] 그는 왕실 가족에게 '버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3]영국 군주의 장남으로서 에드워드는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콘월 공작과 로시 공작이 되었다. 또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과 작센 공작의 칭호도 받았다. 1841년 12월 8일에는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으로,[5][147] 1850년 1월 17일에는 더블린 백작으로 임명되었다.[4]
빅토리아 여왕과 알베르트 공은 에드워드가 모범적인 입헌 군주가 되도록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일곱 살 때부터 여러 가정교사의 감독 아래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에 뛰어나지는 않았다.[7]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에드워드를 지식 있고, 총명하며, 온화한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8]
1859년, 에드워드는 로마로 교육 여행을 다녀온 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0월에는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하여 학부생으로 공부를 즐겼고,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다.[10][11] 1861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로 편입하여 찰스 킹즐리 교수에게 역사를 배웠다.[12][13]

1841년 11월 9일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작센 코부르크 고타 공의 둘째 아이이자 장남으로 런던의 버킹검 궁전에서 태어났다.[216] 태어나면서 콘월 공작에 서임되었고,[217] 한 달 후인 12월 4일에는 웨일스 공에 서임되었다.[218] 1842년 1월 25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고, 아버지 알버트와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인 켄트 공 에드워드의 이름을 따서 "'''알버트 에드워드'''"로 명명되었다. 왕실 내에서는 알버트의 이름에서 따온 "'''버티'''(Berti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220]
빅토리아 여왕의 시녀인 리틀턴 남작 부인 사라 리틀턴(사라 리틀턴)이 유모로 임명되었다.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매우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이튼 칼리지 교사인 헨리 버치가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다. 어린 시절의 에드워드는 말썽꾸러기였다고 하나, 3살 아래 동생 알프레드가 함께 공부하게 되자 동생의 모범이 되고자 학업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언어 능력에 뛰어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3개 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221]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교육에 엄격했으며, 특히 1858년에 누이 빅토리아가 프로이센 왕국의 2위 계승권자 프리드리히 왕자와 결혼하여 런던을 떠난 후에는 부모의 시선이 에드워드에게 집중되었다. 그 때문에 에드워드는 숨 막히는 듯한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222]
1859년 1월부터 육군 대령 로버트 브루스를 보좌역으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 교황령 로마에 유학했다. 프레데릭 레이턴(프레데릭 레이턴)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과 교류하고, 로마 교황 피우스 9세(피우스 9세)와도 만났다.[226] 귀국 후인 1859년 10월부터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했다.[228] 그는 영국 역대 국왕 중 최초로 대학교에서 수학한 국왕이다(단, 정규 코스는 아님).[229] 1862년 6월에 캠브리지 대학교 학업을 마쳤다.[236]
2. 2. 결혼과 가정
1862년 9월 9일 에드워드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인 알렉산드라와 약혼하였으며, 1863년 3월 10일, 윈저성 세인트 조지 교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25] 부부는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나, 부부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라는 내향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난청을 앓고 있었다.[24]
이 부부는 런던 거주지로 말보로 하우스를, 노퍽의 별장으로 샌드링엄 하우스를 정했다. 1863년 11월 알렉산드라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가 덴마크 왕위를 계승하자, 독일 연방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침략하여 합병할 기회를 잡았다.[26]
에드워드는 결혼 생활 내내 정부들을 두었다. 그는 여배우 릴리 랭트리, 랜돌프 처칠 여사, 워릭 백작부인 데이지 그레빌,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 귀족 수잔 베인-템페스트 여사, 가수 오르탕스 슈나이더, 매춘부 줄리아 베네니, 그리고 앨리스 케펠과 사귀었다. 앨리스 케펠의 증손녀 카밀라 파커 볼스는 에드워드의 증손자인 찰스 3세의 정부가 되었고, 이후 왕비가 되었다.[29][30][32]

1874년 1월, 에드워드의 동생인 에딘버러 공작 알프레드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러시아 황실과의 친선 관계 증진에 힘썼다.[254]

에드워드의 장남인 클라렌스 공알버트 빅터(애칭 에디)가 1892년1월 14일에 인플루엔자와 폐렴으로 사망했다.[272] 에드워드는 아들의 죽음에 "자신의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느낄 수 없는 나는 기꺼이 아들의 대신이 되고 싶었다"며 괴로워했다.[273] 에드워드 부부는 에디의 약혼녀였던 메리 공주를 계속해서 딸처럼 대해주었다. 여론 또한 메리에 대한 동정 여론이 강해졌고, 에디를 대신하여 제2 왕위 계승자가 된 차남 요크 공 조지(후일 영국 국왕 조지 5세)와 결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274] 1893년7월 6일에 요크 공과 메리 공주는 결혼하게 되었다.[275]
알렉산드라 왕비와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401]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알버트 빅터 | 1864년 | 1892년 | 클라렌스 공작. 애칭 에디 |
조지 프레데릭 어니스트 알버트 | 1865년 | 1936년 | 차기 국왕 조지 5세 |
루이즈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다그마 | 1867년 | 1931년 | 파이프 공작 알렉산더 부인 |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올가 메리 | 1868년 | 1935년 | |
모드 샬럿 메리 빅토리아 | 1869년 | 1938년 |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왕비 |
알렉산더 존 찰스 알버트 | 1871년 | 1871년 | 요절 |
2. 3. 왕세자 시절
1860년, 에드워드는 웨일스 공으로서 최초로 북미 순방을 실시했다. 그의 쾌활하고 유쾌한 성격과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순방을 대성공으로 이끌었다.[15] 그는 빅토리아 다리의 개통식을 거행하고, 오타와 의사당 언덕의 기초석을 놓았다. 그는 샤를 블롱댕이 고공 와이어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횡단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제임스 부캐넌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다. 부캐넌 대통령은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마운트 버논을 방문하여 조지 워싱턴의 묘소에 경의를 표했다. 어디를 가든 에드워드 왕자는 엄청난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랠프 왈도 에머슨, 올리버 웬델 홈즈 1세를 만났다. 1776년 이후 처음으로 뉴욕 트리니티 교회에서 왕실을 위한 기도가 드려졌다.[15] 캐나다와 미국 전역을 4개월 동안 순방한 것은 에드워드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크게 높였고, 대영제국에 많은 외교적 이점을 가져다주었다.[16]
에드워드는 영국 육군에서 경력을 쌓기를 바랐지만,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현역 군 생활을 거부했다.[17] 그는 1858년 11월 9일에 대령으로 임명되었는데,[18] 시험을 통해 임관을 받고 싶어했던 그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11] 1861년 9월, 그는 독일로 파견되었는데, 표면적으로는 군사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그와 알렉산드라 공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서였다.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공은 이미 에드워드와 알렉산드라의 결혼을 결정했었다. 그들은 1858년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한 에드워드의 누나 빅토리아 공주의 주선으로 9월 24일 슈파이어에서 만났다.[19] 빅토리아 공주는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6월에 슈트렐리츠에서 알렉산드라를 만났는데, 알렉산드라는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와 에드워드는 처음부터 친밀했고, 결혼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20]
에드워드는 바람둥이로 명성을 얻었다. 군 경험을 쌓고자 결심한 그는 아일랜드에서 군사 훈련에 참가했는데, 그 기간 중에 여배우 넬리 클리프든과 3박을 함께 보냈고, 동료 장교들이 캠프에 그녀를 숨겨주었다.[21] 병석에 있던 알버트 공은 이 사실에 경악하여 에드워드를 케임브리지에서 만나 질책했다. 알버트 공은 그 방문 후 2주 만인 1861년 12월에 사망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슬픔에 잠겨 남은 생애 동안 검은 옷을 입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에드워드를 비난했다.[22] 처음에 여왕은 아들을 경솔하고, 무분별하며,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며 혐오감을 느꼈다. 그녀는 장녀에게 편지를 써서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몸서리칠 것이다"라고 썼다.[23]
어머니가 미망인으로 지내는 동안 에드워드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왕실의 공개 석상 출현이라는 개념을 개척했다. 예를 들어, 1871년 템스 제방 개장, 1886년 머지 철도 터널, 1894년 타워 브리지 개통 등이 있다.[36]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1898년까지 그에게 국가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역할을 허락하지 않았다.[37][38] 그는 중요한 정부 문서의 요약본을 받았지만, 어머니는 원본에 대한 접근을 거부했다.[11] 에드워드는 독일을 선호했던 어머니를 186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 덴마크 편을 들면서 짜증나게 했고, 같은 해 주세페 가리발디를 만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다시 한번 어머니를 짜증나게 했다.[39] 자유당의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그에게 비밀리에 서류를 보냈다.[11] 1886년부터 외무장관 로즈베리 경은 그에게 외무부의 공문을 보냈고, 1892년부터는 일부 내각 문서가 그에게 공개되었다.[11]
1870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영국에서 공화주의 정서가 고조되었다.[40] 그러나 1871년 겨울, 죽음 직전의 경험은 에드워드의 대중적 인기와 어머니와의 관계 개선으로 이어졌다. 노스요크셔주 스카버러 근처 론데스보로 롯지에 머무는 동안 에드워드는 아버지를 죽게 했다고 여겨지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전국적으로 큰 우려가 있었고, 그의 동행 중 한 명이 사망했다. 에드워드의 회복은 거의 전국적인 안도감으로 맞이되었다.[11] 공개적인 축하 행사로는 아서 설리번의 축제 테 데움 작곡이 포함되었다. 에드워드는 공화주의자들을 포함한 모든 당파의 정치인들을 친구로 삼아 그에 대한 잔여 감정을 대부분 해소했다.[41]

1875년 9월 26일, 에드워드는 8개월에 걸친 광범위한 인도 순방을 시작했다. 그는 가는 길에 몰타, 브린디시, 그리스를 방문했다. 그의 고문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이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그의 습관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편지에서 영국 관리들에 의한 인도 원주민들의 대우에 대해 불평했다. "어떤 사람이 검은 얼굴을 하고 우리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짐승처럼 대우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42] 결과적으로 인도 국무장관 솔즈베리 경은 새로운 지침을 발표했고 적어도 한 명의 거주민이 해임되었다.[11] 그는 포르투갈에 들른 후 1876년 5월 11일에 영국으로 돌아왔다.[43] 순방이 끝날 무렵, 빅토리아 여왕은 순방의 성공의 결과로 의회로부터 인도 황후라는 칭호를 받았다.[44]
에드워드는 전 세계적으로 남성 패션의 권위자로 여겨졌다.[45][46] 그는 트위드, 홈부르크 모자, 노퍽 재킷을 유행시켰고, 화이트 타이와 테일 대신 디너 재킷에 검은색 넥타이를 매는 것을 유행시켰다. 그는 현재 일반적인 앞뒤 주름 대신 바지 다리를 옆으로 다림질하는 것을 개척했고,[48] 샤르베가 그를 위해 만든 세워지는 턴다운 셔츠 칼라를 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49] 적절한 복장에 엄격했던 그는 트리니티 하우스의 장로의 바지와 추밀원 의원의 코트를 함께 입은 솔즈베리 경을 꾸짖었다고 한다. 국제적인 위기에 처한 솔즈베리는 어두운 아침이었고 "내 마음은 덜 중요한 일에 몰두했을 것이다"라고 에드워드에게 알렸다.[50] 조끼의 아래 단추를 채우지 않는 남성들의 전통은 허리가 컸던 에드워드가 풀어놓았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11][51] 그의 허리 둘레는 즉위 직전 약 121.92cm였다.[52] 그는 일요일에 쇠고기 구이와 감자를 홀스래디시 소스와 요크셔 푸딩과 함께 먹는 관습을 도입했는데, 이는 일요일 점심의 주요 영국 음식으로 남아 있다.[53] 그는 평생 흡연가였지만, 샴페인과 가끔 포트와인을 마셨지만, 과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54]
에드워드는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였으며 왕립음악대학 설립을 도왔다. 그는 1883년 학교 개교식에서 "계급은 더 이상 계급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음악이 제가 매우 증진하고자 하는 그러한 감정의 결합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합니다"라고 말했다.[44] 동시에 그는 도박과 시골 스포츠를 즐겼고 열렬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사냥에 더 많은 일광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샌드링엄의 모든 시계가 30분 앞당겨 가도록 명령했다. 소위 샌드링엄 시간의 이러한 전통은 에드워드 8세가 폐지한 1936년까지 계속되었다.[55] 그는 윈저에 골프 코스도 조성했다. 1870년대까지 에드워드는 경마와 장애물 경주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96년 그의 말 페르시몬은 더비와 세인트 레저에서 모두 우승했다. 1900년 페르시몬의 형제 다이아몬드 주빌리는 5개의 경주(더비, 세인트 레저, 2000 기니, 뉴마켓 스테이크스, 이클립스 스테이크스)에서 우승했고[56] 에드워드의 또 다른 말 앰부시 2세는 그랜드 내셔널에서 우승했다.[57]

1891년 에드워드는 전년에 불법 카드 게임으로 돈을 걸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로열 바카라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는 참가자 중 한 명이 사기 혐의로 다른 참가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을 때 두 번째로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야 했다.[58] 같은 해 에드워드는 찰스 베레스포드 경이 에드워드가 워릭 백작 부인 데이지 그레빌과의 베레스포드의 불륜에 간섭하는 것에 대한 항의로 에드워드의 사생활 세부 사항을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개인적인 갈등에 휘말렸다. 두 사람의 우정은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되었고, 그들의 불화는 생애의 나머지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59] 일반적으로 에드워드의 격렬한 분노는 짧았고, "그가 마음껏 쏟아낸 후에는... 특별히 친절하게 일을 처리했다".[60]
1891년 말 에드워드의 장남 앨버트 빅터는 빅토리아 메리 공주와 약혼했다. 불과 몇 주 후인 1892년 초 앨버트 빅터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에드워드는 비통해했다. "우리의 장남을 잃는 것은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재앙 중 하나입니다." 에드워드는 여왕에게 "내 생명을 그를 위해 바쳤을 것입니다. 내 생명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61] 앨버트 빅터는 에드워드의 자녀 중 두 번째로 사망한 자녀였다. 1871년 그의 막내 아들 알렉산더 존은 태어난 지 24시간 만에 사망했다. 에드워드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직접 알렉산더 존을 관에 넣었다.[62]
1900년 4월 4일 벨기에를 거쳐 덴마크로 가는 길에 에드워드는 15세의 장-바티스트 시피도가 제2차 보어 전쟁에 항의하여 그에게 총을 쏘면서 암살 시도의 희생자가 되었다. 범인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벨기에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63] 벨기에 당국의 느슨한 태도와 함께 콩고 자유국의 벨기에의 만행에 대한 영국의 혐오감은 영국과 대륙 간의 이미 좋지 않은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러나 그 후 10년 동안 에드워드의 친절함과 인기, 그리고 가족 관계의 활용은 영국이 유럽 동맹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64]
2. 4. 즉위와 통치
빅토리아 여왕의 맏아들로 60세에 즉위하였다. 1901년 1월 22일 와이트 섬의 오즈번 하우스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자, 에드워드는 영국 국왕, 인도 황제, 그리고 영국 독립국의 국왕이 되었다.[65] 그는 어머니가 의도했던 앨버트 에드워드라는 이름 대신 에드워드 7세라는 휘하로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앨버트라는 이름을 과소평가하고" 아버지의 지위를 낮추고 싶지 않으며, "그 이름은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66]

재위 기간 동안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모로코 사건 이후, 영러 협상을 맺어 독일 포위 체제를 이루었다. 그는 거의 모든 유럽 군주들과 친척 관계였으며, "유럽의 삼촌"(uncle of Europ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7]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조카였으나, 에드워드 7세가 싫어했던 친척은 빌헬름 2세였다. 그의 조카와의 어려운 관계는 독일과 영국 간의 긴장을 악화시켰다.[85]
국내에서는 자유당과 보수당이 대립하여 곤란한 문제에 부딪히고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외교관계를 혈연관계를 이용하여 풀어나가려 하였다.
그의 고손자이자 당시 영국의 왕세자인 웨일스 공 찰스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영국 왕실에서 가장 오랫동안 웨일스 공의 자리에 있었다.
에드워드는 부모의 집인 와이트 섬의 오스본을 국가에 기증하고 샌드링엄에 계속 거주했다.[68] 그는 재정적으로 부채 없이 왕위를 계승한 최초의 상속자였다.[69] 에드워드의 재정은 왕실 재무관인 다이턴 프로빈 경이 능숙하게 관리했고, 에드워드의 금융가 친구들(어니스트 캐셀, 모리스 드 히르슈, 로스차일드 가문 등)로부터 조언을 얻었다.[70] 널리 퍼진 반유대주의 시대에 에드워드는 유대인들과 공개적으로 사교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71][72]
에드워드의 대관식은 원래 1902년 6월 26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이틀 전에 충수염 진단을 받았다.[73] 2주 후, 그는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발표되었다. 에드워드는 1902년 8월 9일 캔터베리 대주교인 프레더릭 템플에 의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다.[73]
에드워드는 왕궁을 개조하고, 어머니가 포기했던 국회 개원과 같은 전통 의식을 재도입하고, 공로훈장을 설립했다.[78]
2. 4. 1. 국내 정치
에드워드 7세는 정치에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일부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니거"라는 단어의 사용이 "수치스럽다"고 말했다.[102] 1904년 킬에서 열린 영국-독일 정상 회담에서 빌헬름 2세는 러일 전쟁을 염두에 두고 "황색 위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교와 유럽 문명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라고 불렀다. 러시아인들이 계속해서 땅을 내주면 20년 후에는 황색 인종이 모스크바와 포즈난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03] 빌헬름 2세는 영국이 러시아에 대항하여 일본을 지원한 것에 대해 영국이 "인종 반역"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에드워드 7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인들은 지능적이고 용감하며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민족이며, 피부색만 다를 뿐 유럽인들만큼 문명화되었다"고 말했다.[103]웨일스 공 시절 에드워드는 W. E. 글래드스톤의 인민대표법안 (1884년)에 대해 상원에서 공개적으로 투표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11][89] 그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고,[11][90] 아일랜드 자치에 반대하고 대신 일종의 이중 군주제를 선호하는 등[11]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 개혁가 옥타비아 힐이 노동계급 주택 위원회에서 활동할 것을 제안했다.[91]
에드워드는 어머니가 혐오했던 W. E. 글래드스톤과 따뜻하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를 맺었다.[92] 그러나 국무장관의 아들인 내무장관 허버트 글래드스톤이 런던 거리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제복을 입고 성체를 들고 다니는 것을 허용하려는 계획과 레이디 프랜시스 발푸어, 메이 테넌트를 이혼법 개혁에 관한 왕실 위원회에 임명한 것으로 왕을 화나게 했다. 에드워드는 여성 앞에서는 이혼을 "섬세하게 또는 심지어 점잖게" 논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의 전기 작가 필립 매그너스-올크로프트는 글래드스톤이 자유당 정부에 대한 왕의 전반적인 불만에 대한 속죄양이 되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글래드스톤은 다음 해 개각에서 해임되었고 왕은 약간의 주저 끝에 그를 남아프리카 총독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했다.[93]
에드워드 7세는 보어 전쟁의 실패로 인해 필요성이 명백해진 군 개혁 논의에 적극 참여했다.[94] 그는 군 사령부 재설계, 영토군 창설, 독일 제국과의 전쟁 발생 시 프랑스를 지원하는 원정군 제공 결정을 지지했다.[95] 독일 제국 해군이 새로운 전략적 위협으로 등장함에 따라 해군 예산이 계속 증가했기 때문에 왕실 해군 개혁도 제안되었다.[96] 궁극적으로 찰스 베레스퍼드 제독과 해군참모총장 존 피셔 제독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베레스퍼드는 지출 증가와 광범위한 배치를 지지했고, 피셔는 효율성 향상, 낡은 함선 폐기, 국내 방어를 위한 어뢰정에 의존하고 새로운 드레드노트 함선으로 지원되는 왕실 해군의 전략적 재편을 지지했다.[97][98]
왕은 베레스퍼드를 싫어했기 때문에 피셔를 지지했고, 결국 베레스퍼드는 해임되었다. 베레스퍼드는 해군 외부에서 자신의 운동을 계속했고 피셔는 1909년 말 사임했지만 그의 정책 대부분은 유지되었다.[99] 피셔-베레스퍼드의 불화로 해군이 분열되었기 때문에 왕은 피셔의 후계자 임명에 깊이 관여했으며, 양 진영 모두 외부에 있는 유일하게 자격을 갖춘 인물은 1907년에 은퇴한 아서 윌슨 경이었다.[100] 윌슨은 현역 복귀를 꺼렸지만 에드워드는 그를 설득했고 윌슨은 1910년 1월 25일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101]
에드워드 7세는 생애 마지막 해에 헌법 위기에 휘말렸다. 당시 하원에서 다수당이었던 보수당이 H. H. 애스퀴스의 자유당 정부가 제안한 "국민 예산(People's Budget)" 통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위기는 결국 에드워드 7세 사후 상원의 입법 거부권 박탈로 이어졌다.
국왕은 자유당이 귀족들을 공격한 것에 불만을 가졌는데, 여기에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라임하우스에서 한 논쟁적인 연설도 포함되어 있었다.[104] 내각 장관 윈스턴 처칠은 공개적으로 총선을 요구했고, H. H. 애스퀴스는 국왕의 고문 놀리스 경에게 사과하고 내각 회의에서 처칠을 질책했다. 에드워드 7세는 계급 투쟁 분위기에 낙담했는데, 그는 아들에게 육군장관 리처드 할데인을 소개하면서 "영국의 마지막 국왕(the last King of England)"이라고 말했다.[105] 1909년 7월 26일 국왕의 경주마 미노루가 더비 경주에서 우승하자, 그는 다음 날 다시 경마장으로 돌아와 어떤 남자가 "국왕이시여, 더비에서 우승하셨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이 더러운 의회를 해산하십시오!"라고 외치자 웃었다.[106]
국왕은 보수당 지도자 아서 밸푸어와 랜즈다운 경에게 예산안 통과를 촉구했지만 소용없었다. 에셔 경은 국왕에게 빅토리아 여왕도 1869년 아일랜드 국교 해체와 1884년 제3차 개혁법에 관한 양원 간 합의를 중재하는 데 도움을 준 바 있다고 조언했다.[107] 그러나 H. H. 애스퀴스의 조언에 따라 그는 그들에게 선거를 제안하지 않았다 (최근 보궐선거 결과를 볼 때 보수당은 의석을 얻을 가능성이 높았다).[108]
예산안은 1909년 11월 5일 하원을 통과했지만, 11월 30일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상원은 대신 랜즈다운 경의 결의안을 통과시켜, 선거적 정당성이 부족한 법안에 반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왕은 예산안 통과를 촉구하려던 자신의 노력이 공개된 것에 짜증을 내었고[109], 놀리스 경에게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놀리스 경은 이것이 국왕의 예산안 통과 희망을 보여주는 적절한 제스처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었다.[110] 1909년 12월, 귀족 작위를 수여하여 상원에서 자유당의 다수당을 확보하거나 총리가 그럴 권리를 갖도록 하는 제안이 놀리스 경에 의해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는 국왕이 이에 동의하기보다는 퇴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111]
상원의 거부권을 박탈하려는 논의는 1910년 1월 총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총선 운동 초기에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정부 재구성 전에 필요한 "보장(guarantees)"에 대해, 애스퀴스는 "안전장치(safeguards)"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국왕이 애스퀴스에게 두 번째 총선 이후가 아니면 귀족 작위 수여를 고려하지 않겠다고 알린 후 그러한 논의는 중단되었다.[11][112] 아서 밸푸어는 보수당 정부를 구성할 의향이 있는지 여부를 밝히지 않았지만, 국왕에게 제안된 헌법 개정 조항을 보기 전까지 귀족 작위 수여를 약속하지 말라고 조언했다.[113] 선거 운동 중에 보수당의 주요 인물인 월터 롱은 국왕이 아일랜드 자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지 놀리스 경에게 허락을 구했지만, 놀리스 경은 군주가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했다.[114]
선거 결과, 자유당 정부는 제3당인 아일랜드 민족주의 아일랜드 의회당의 지지에 의존하는 교수형 정부(hung parliament)가 되었다. 국왕은 각 당에서 50명의 귀족만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상원 내 보수당의 대다수를 무력화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원 내 자유당 지도자인 로버트 크루는 이것이 당에 충성하는 귀족만 선출되므로 상원의 독립성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조언했다.[114] 이제 상원의 거부권을 박탈하라는 압력은 아일랜드 자치법 도입을 막을 수 있는 상원의 능력을 제거하려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의원들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하지 않으면 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위협했다 (위스키 세금을 개정하여 아일랜드 민족주의 의원들의 지지를 얻으려던 로이드 조지의 시도는 내각이 예산안을 너무 많이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여 중단되었다). H. H. 애스퀴스는 이제 귀족 작위 수여에 대한 "보장"이 없다고 밝혔다. 내각은 사임하고 밸푸어에게 보수당 정부 구성을 시도하도록 맡기는 것을 고려했다.[115]
2월 21일 국왕의 즉위 연설은 상원의 거부권을 지연권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도입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H. H. 애스퀴스는 "나의 고문들의 의견으로는(in the opinion of my advisers)"이라는 구절을 삽입하여 국왕이 계획된 법안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116] 하원은 4월 14일 1911년 의회법의 기초가 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상원의 재정 법안 거부권을 박탈하고, 다른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지연권으로 대체하며, 의회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는 것이었다 (국왕은 4년을 선호했다)[113]. 그러나 H. H. 애스퀴스는 그 논쟁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 의원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국왕에게 "그 의회에서"(즉, 에드워드 7세가 이전에 두 번째 총선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는 반대로) 교착 상태를 해소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라고 암시했다. 예산안은 4월에 하원과 상원 모두를 통과했다.[117]
4월까지 궁궐은 아서 밸푸어와 캔터베리 대주교 랜달 데이비드슨과 비밀 회담을 가졌는데, 그들은 모두 자유당이 귀족 작위 수여를 요구할 만한 충분한 위임을 받지 못했다고 조언했다. 국왕은 이 제안 전체를 "단순히 역겹다(simply disgusting)"고 생각했고, 정부가 "레드먼드와 동료들의 손에 있다(in the hands of Redmond & Co)"고 생각했다. 로버트 크루 경은 정부가 귀족 작위를 수여하려는 바람은 공식적인 "각료의 자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관례적으로 군주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에셔 경은 군주가 그들의 "자문"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정부를 해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118] 에셔 경의 견해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obsolete and unhelpful)"고 불렸다.[119]
2. 4. 2. 외교 정책
빅토리아 여왕의 맏아들로 60세에 즉위한 에드워드 7세는 국왕으로서 외교, 해군 및 군사 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통했던 그는 유럽 전역의 수많은 국빈 방문을 통해 왕실 외교를 새롭게 정립했다.[82] 그는 매년 비야리츠와 마리엔바드에서 휴가를 보냈다.[55]1903년 5월 에밀 루베 대통령의 초청으로 프랑스를 공식 방문했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앙탕트 코르디알(Entente Cordiale)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1904년에 체결된 이 협정은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구획하고 두 나라 간의 미래 전쟁을 배제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수세기 동안 지속된 영불간의 라이벌 관계와 영국의 고립주의(splendid isolation)의 종식을 의미했으며, 성장하는 독일 제국과 그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력에 맞서기 위한 시도였다.[83]
에드워드 7세는 거의 모든 유럽 군주들과 친척 관계였으며, "유럽의 삼촌"(uncle of Europ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7]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조카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7세가 싫어했던 친척이 한 명 있었는데, 바로 빌헬름 2세였다. 그의 조카와의 어려운 관계는 독일과 영국 간의 긴장을 악화시켰다.[85]
1908년 6월, 에드워드 7세는 재위 중인 영국 군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 제국을 방문했다. 1906년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러일 전쟁, 도거뱅크 사건 등으로 긴장되었을 때 방문을 거부했음에도 이루어진 방문이었다.[87] 그 전 달에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방문하여 영국 군주로는 처음으로 스웨덴을 방문했다.[88]
에드워드 7세는 보어 전쟁의 실패로 인해 필요성이 명백해진 군 개혁에 관한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94] 그는 군 사령부의 재설계, 영토군의 창설, 그리고 독일과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프랑스를 지원하는 원정군을 제공하기로 한 결정을 지지했다.[95]
에드워드 7세에게는 빌헬름 2세의 황화론과 같은 인종적 편견은 없었다. 젊은 시절 인도 방문 당시 백인의 유색인종에 대한 오만한 태도를 보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373]
프랑스에 대해 에드워드 7세는 젊은 시절부터 친프랑스파였다. 첫 프랑스 방문 시 나폴레옹 3세에게 "당신의 나라는 훌륭한 나라입니다.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다만 그의 친프랑스 성향은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친독일 정책에 대한 반발도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다.[371]
한편, 영국의 프랑스·러시아·일본과의 접근으로 고립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그의 삼촌 에드워드를 독일 포위망의 핵심 인물로 원망했다.[374]
2. 5. 죽음
에드워드 7세는 습관적으로 하루에 담배 20개비와 시가 12개를 피웠다. 1907년, 코 옆에 기저세포암이 발병하여 라듐으로 치료하였다.[405] 말년에 이르러 기관지염을 심하게 앓았다. 1909년 2월 베를린 국빈 방문 중에는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는 몇 번의 심장마비를 겪었지만, 잠자리에 들기를 거부했다. 고통을 느끼며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었고 "아니, 나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 할 것이다. 나는 끝까지 일할 것이다."와 같은 유언의 말을 하였다. 기절하는 순간 사이에 그의 아들 웨일스 공 조지(조지 5세)가 "오늘 오후 에드워드의 애마인 ''Witch of the air'' 가 경주에서 이겼다고 말했다. 이에 에드워드는 "그래, 그말을 들으니 나는 매우 기쁘구나" 하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오후 11시 30분, 그는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후 11시 45분 에드워드 7세는 6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5월 11일, 에드워드 7세의 시신은 제복을 입고 거대한 참나무 관에 안치되었다. 5월 14일 왕실내로 옮겨져 봉해졌고, 상여의 각 모퉁이에 경비원이 경호하였다. 5월 17일 아침, 관을 포차에 싣고 검은 말이 끄는 마차에 이끌려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했는데, 조지 5세와 가족들, 그리고 에드워드의 애견 카이사르가 뒤를 따라 걸었다. 약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참배하여 국왕을 추모하였다.[406]
1910년 5월 20일,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장례식은 세계 각국의 국왕과 왕족이 참석한 마지막 장례식이 되었다. 그의 관은 윈저성으로 운반되었고 세인트 조지 교회당에 안장되었다.[407]


3. 유산
에드워드 7세는 영국 역사상 왕세자 신분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인물로, 2011년 4월 20일 그의 증손자인 찰스 3세가 이 기록을 경신했다.[127] 웨일스 공작 칭호는 왕세자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위 중인 군주가 수여하는 것이다.[128] 에드워드 7세는 1841년 12월 8일부터 1901년 1월 22일까지 59년 45일 동안 웨일스 공작 칭호를 보유했으며, 찰스 3세는 1958년 7월 26일부터 2022년 9월 8일까지 이 칭호를 보유하여 2017년 9월 9일 에드워드 7세의 기록을 경신했다.[129][130][131]
국왕으로서 에드워드 7세는 예상을 뛰어넘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132] 이미 평균 수명을 넘긴 상태였기에 재위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자신의 둘째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조지 5세가 왕위를 잘 계승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의 관계를 부자 관계보다는 애정 어린 형제 관계로 묘사했으며,[133] 에드워드 7세가 사망했을 때 조지 5세는 일기에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고의 아버지를 잃었다... 평생 그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슬픔에 잠겨 압도당했다"라고 적었다.[134]
에드워드 7세는 진정한 입헌군주제 최초의 영국 국왕이자, 실질적인 정치적 권력을 행사한 마지막 국왕으로 평가받는다.[135] 그는 "평화조정자"로 칭송받았지만,[136] 그의 조카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을 것을 우려했다.[137] 에드워드 7세 사후 4년 만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으며, 그가 지지했던 해군 개혁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의 삼국 협상 체결, 그리고 그의 광범위한 가족 관계는 독일 황제의 편집증을 악화시켰고, 그는 전쟁의 책임을 에드워드 7세에게 돌렸다.[138] 에드워드 7세의 공식 전기를 집필한 시드니 리는 독일 선전가들이 에드워드 7세를 반독일적인 호전적인 인물로 묘사하기 위해 자료를 선택할 것을 우려하여 1927년까지 출판을 연기했다.[139] 리는 에드워드 7세가 사망 시 모든 편지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려 개인 서류가 광범위하게 파괴된 점에도 어려움을 겪었다.[140] 이후 전기 작가들은 리에게 제공되지 않았던 자료와 출처를 활용하여 에드워드 7세에 대한 더욱 포괄적인 그림을 구성할 수 있었다.[141]
1936년, 역사학자 R. C. K. 엔서는 국왕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칭찬했다. 엔서는 에드워드 7세가 영국의 대외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널리 퍼진 생각은 그가 해외 여행을 자주 하고 외국 궁정을 방문하는 많은 홍보 방문을 통해 얻은 명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남아 있는 문서들이 "대외 정책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얼마나 비교적 조잡했는지, 얼마나 적게 읽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순진한 무분별한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143] 에드워드 7세는 자기만족적인 쾌락 추구에 대해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상냥한 태도와 외교적 수완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손자인 에드워드 8세는 "그의 가벼운 면은... 그가 통찰력과 영향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렸습니다."라고 썼다.[144] J. B. 프리스트리는 "그는 쾌락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의무감도 있었다"고 평가했다.[145] 에셔 경은 에드워드 7세를 "친절하고 멋지고 위엄이 있었지만 너무 인간적이었다"고 묘사했다.[146]
에드워드 7세는 여러 스캔들에도 연루되었다. 1869년, 찰스 모르다운트 경의 아내인 해리엇 모르다운트는 에드워드 7세를 포함한 여러 남성과의 불륜을 암시했고, 모르다운트 경은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에드워드 7세는 증인으로 출두하여 불륜 사실을 부인했지만, 왕세자가 이혼 소송에 휘말린 것은 큰 수치였다.[247][248] 1890년에는 로열 바카라 스캔들에 연루되어 다시 법정에 서게 되었다. 바카라 도박 중 부정행위 혐의를 받은 윌리엄 고든-커밍 경이 소송을 제기했고, 에드워드 7세는 증인으로 출석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에드워드 7세는 다시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육군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장교의 행실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부대장에게 책임이 있다"는 군의 상식을 따르지 않은 점이 문제가 되었다.[269]
에드워드 7세는 패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디렉터스 수트는 그의 발안으로 여겨지며, 이전에는 실내복이나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여겨졌던 삼벌 수트를 프록코트, 모닝코트와 함께 정장으로 격상시켰다.[395] 홈부르크 모자를 유행시킨 것도 에드워드 7세였다. 그는 글렌체크 무늬 옷을 즐겨 입어, 이 무늬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396] 넥타이 매듭 방식 중 하나인 "프린스 앨버트"는 매듭을 작게 만드는 방법이다.[397]
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기도 했다. 1868년 스웨덴 국왕 칼 15세에 의해 프리메이슨에 가입했으며, 1870년부터 잉글랜드 연합 그랜드 로지의 그랜드 마스터를 역임했지만, 즉위 후 사임했다.[398] 그는 "유럽의 큰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이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숙부였기 때문이다.[399] "웨일스 공" 등 "웨일스 공"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유 명사는 대부분 에드워드 7세에게서 유래했다. 그는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아 1907년 왕립 자동차 클럽(RAC) 설립을 명령했다.[400]
4. 가족 관계
에드워드 7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인 알렉산드라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두었다.[401]
사진 | 이름 | 출생 | 사망 | 기타 |
---|---|---|---|---|
![]() | 클래런스와 에이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 1864년 1월 8일 | 1892년 1월 14일 | |
![]() | 조지 5세 | 1865년 6월 3일 | 1936년 1월 20일 | |
![]() |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 | 1867년 2월 20일 | 1931년 1월 4일 | |
![]() | 빅토리아 공주 | 1868년 7월 6일 | 1935년 12월 3일 | |
![]() | 웨일스 공녀 모드 | 1869년 11월 26일 | 1938년 11월 20일 | |
알렉산더 존 왕자 | 1871년 4월 6일 | 1871년 4월 7일 |
5. 에드워드 7세의 이름이 붙은 것
- 에드워드 7세 병원
- 에드워드 7세급 전함
- 포클랜드 제도의 킹 에드워드 7세 메모리얼 병원
- 킹 에드워드 역 (King Edward Station)
- 킹 에드워드 의과대학교 (King Edward Medical University)
- 웨일스 공 등 "웨일스 공"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유 명사는 에드워드 7세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 애스콧 경마장에서는 에드워드 7세를 기념하여 킹 에드워드 7세 스테이크스가 개최되고 있으며, 프린스 오브 웨일스 스테이크스도 에드워드 7세의 왕세자 시대에 창설되었다.[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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